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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21 23:32
‘필름’ 끊긴 피해자와 모텔… 대법 "강제추행" 유죄 반전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  

'알코올 블랙아웃' 심신상실 인정 첫 판례
"기억 없단 이유로 '동의' 단정해선 안 돼"

게티이미지뱅크

성추행 피해자가 범행 당시 만취해 기억을 잃었다면, 성적 접촉에 대한 피해자 동의 여부는 전후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술에 취한 피해자가 비틀거리지 않고 혼자서 걷는 등 일부 정황만 가지고, 피해자가 멀쩡한 상태였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공무원 김모(당시 28세)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에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김씨는 2017년 2월 당시 18세였던 피해자 A양을 우연히 만나 모텔로 데려간 뒤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사건 당일 A양은 소주 2병을 1시간 만에 마시고는, 바닥에 눕거나 소지품을 분실하는 등 만취 상태였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성적 관계에 대한 'A양 동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자신과 A양이 마주친 이후 함께 A양 분실물을 찾으려 인근 술집 여러 곳을 돌았는데, 한 술집 테이블에서 잠들었던 A양이 깨어나 “한숨만 자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자신이 “모텔에 가서 자자는 거냐”고 되묻자, A양도 동의했다는 게 김씨 주장이었다. 반면 A양은 김씨를 만났던 상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1심은 김씨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판단을 뒤집어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A양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틀거리거나, 김씨가 피해자를 부축한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며 피해자의 심신상실(음주 등으로 성적 행위에 대한 정상적 판단 능력이 없는 것) 상태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특히 A양이 동의를 해놓고도, 이후 '알코올 블랙아웃'을 이유로 그 사실을 잊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2심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다시 반전이 이뤄졌다. 대법원은 "알코올의 영향은 개인적 특성 및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며 "피해자가 스스로 걷거나,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게 가능하다고 해서 범행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CCTV 영상을 봐도, A양이 혼자 걷기는 하지만 계단을 오르내릴 때 휘청거리거나 계속 벽에 기대는 등 상당히 취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특히 “‘필름이 끊겼다’는 피해자 진술만으로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은 채 ‘알코올 블랙아웃’ 가능성을 쉽사리 인정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씨와 A양이 일면식도 없던 사이란 점, 두 사람 나이차 등을 고려할 때 A양이 김씨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했다고 볼 정황이 없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알코올 블랙아웃을 심신상실 상태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본 첫 대법원 판례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